챕터 2
그녀는 블랑팡을 키우고 성장시킨 스위스 워치 하우 스 최초의 여성 CEO이자 오너였다. 그녀는 대공황, 세계대전, 사업 파트너의 죽음, 쿼츠 워치의 등장 등 많은 위기를 헤쳐나갔다.
‘베티(Betty)’로 알려진 베르테-마리 피슈 테르(Berthe-Marie Fiechter)는 제 1차 세 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12년 경력 을 시작했다. 제1·2차 세계대전, 대공황, 사 업 파트너의 죽음, 암과의 투쟁, 스위스 시 계 산업 전반을 무너뜨린 쿼츠 위기 등을 거치면서도 그녀는 피프티 패덤즈와 레이 디버드 등 선구적 타임피스를 만들어내고 블랑팡을 무브먼트 매뉴팩처로 성장시키 며 블랑팡을 위한 자신의 비전을 펼쳤다. 그녀는 스위스 워치 하우스의 첫 여성 CEO이자 오너였지만 그녀 생전에 스위스 여성의 권리는 확립되지 못했다.
스위스의 외딴 마을 빌레레 (Villeret ) 는 블 랑팡의 탄생지이자 이후 2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블랑팡의 집이었다. 현재 레 플랑시 (Les Planches) 옆으로 향한 북쪽 언덕을 지 나 빌레레를 찾는 방문객들은 그녀의 삶을 기리는 기념비를 지나가게 될 것이다. 그녀 의 흉상이 1896 년 그녀가 탄생하고 1971 년 세상을 떠난 곳 위에 자리한 수즈 (Suze) 너 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세상 을 떠난 후 거의 반세기가 흘렀지만 빌레레 의 연장자들은 아직도 그녀를 잊지 않고 있 다. 그녀의 커리어가 없었다면 블랑팡의 역 사를 써 내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
베티는 사업에서 정점에 올랐지만 결코 유 리한 고지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와는 정반대로 견습과 함께 모든 기본 교육 을 이수했다. 그녀가 자라온 환경이 고향에 뿌리를 둔 워치메이킹 커리어로 그녀를 이 끌었다. 그녀의 아버지 제이콥 피슈테르 (Jacob Fiechter)는 여자 형제의 가족과 함 께 빌레레를 가로지르는 메인 도로 바로 위 에 자리한 작은 컴플리케이션 워치 무브먼 트 사업체 마뉘팍티르 데보슈 콩플리케 외 젠 람 (Manufacture d’Ébauches Compliquées Eugène Rahm ) 을 공동 운영했다 . 이후 이 사 업체는 1914 년 블랑팡에 인수되었다. 베티 는 커리큘럼에 파트타임 견습이 포함되어 있 는 지역 비즈니스 스쿨 (École de Commerce , 이중 교육 비즈니스 스쿨 ) 에 등록하며 시계 관련 커리어에 뛰어들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리고 1912 년 시작된 견습을 위해 이미 빌 레레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자리 잡은 블랑팡 을 선택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반세 기가 넘는 시간 동안 블랑팡과 함께하게 되 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빌레 레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상티미에 (St. Imier) 병원에 입원한 프랑스 부상병을 돌 보는 파트타임 봉사를 했다. 스위스는 전쟁 내내 중립을 유지했고 침공도 일어나지 않 았지만,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이 부상병을 위해 스위스에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허가 했다. 대신 회복 후 전쟁터로 돌아가지 않는 다는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스위스는 관용 의 일환으로 일반 참모가 부상병을 돌보기 위해 스위스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 이 러한 과정을 거쳐 베티와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앙드레 레알 (André Léal )이라는 프랑 스 장교 참모였다. 그는 전쟁에서 임무를 수 행하는 동안 베티를 만났고, 이후 그녀의 인 생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3년의 견습을 거친 베티는 1915 년 프레데리 크 -에밀 블랑팡 (Frédéric-Emile Blancpain ) 의 어시스턴트로 정식 고용되었다. 프레데 리크 -에밀은 1735 년 빌레레에서 가족 사업 을 시작한 예한 -자크 블랑팡 (Jehan-Jacques Blancpain ) 의 6대손이었다. 예한 -자크의 후 손들은 기술, 정치, 경제의 발전 속에서 사 업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갔다. 1900년까지 빌레레를 고향이라 부르는 워치 하우스가 20개나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얼마나 큰 성 공을 거두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이 숫자 는 3개로 줄어들었고, 블랑팡은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블랑팡에서 보낸 13년간 프레데리크-에밀 은 베티를 빌레레 워크숍의 디렉터로 훈련 시키며 모든 생산 과정을 관할하게 했다. 그 가 베티에게 사업체를 경영하도록 하고 자 신은 거처를 빌레레에서 로잔(Lausanne)으 로 옮기며 매일 살펴보지 않은 것도 그녀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베 티는 현재도 빌레레에 자리하고 있는 블랑 팡 건물 사무실 위층에서 지냈다. 어떤 면에 서 이 둘의 관계는 꽤 현대적이고 진보적이 었다. 그들은 딕터폰(Dictaphone) 왁스 실 린더 녹음기를 사용해 우편으로 커뮤니케 이션했다.
프레데리크-에밀은 1932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딸 넬리(Nellie)는 가족 사업을 이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베티가 대신 블 랑팡을 인수하길 바랐다. 넬리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베티에게 감동적인 편지 를 보냈다.
“아버지의 빌레레가 막을 내리는 것은 너무 나 슬프지만 이 슬픔을 조금이라도 줄일 유 일한 방법은 바로 당신과 미스터 레알이 함 께 매뉴팩처를 인수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로 인해 저는 블랑팡의 소 중한 과거와 전통이 계속 계승될 수 있으리 라 믿습니다.
당신은 아버지에게 몇 안 되는 소중한 파트너 였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이 베풀어준 친절함 과 부드러움을 제 마음속에 새기겠습니다.”
전쟁을 겪으며 빌레레와 친숙해진 앙드레 레알은 블랑팡에서 스위스 이외 마켓을 공 략하는 세일즈를 담당하게 되었다. 넬리의 편지에서 언급한 대로 앙드레는 베티와 함 께 블랑팡을 인수했다.
파트너십을 맺은 초기에는 상황이 결코 만 만치 않았다. 우선 그들은 ‘블랑팡’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잃었다. 당시 스위스 법규에 따르면 사업체명에 가족 이름이 들 어갈 경우 그 가족의 성을 사용하는 사람이 사업체에 한 명도 없을 경우에는 브랜드명 을 사용할 수 없었다. 프레데리크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는 브랜드에 블랑팡 가족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블 랑팡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 다. 현존하는 유명 제네바 시계업체가 가족 사업을 이어갈 일원이 없어지자 시계 관련 기술이나 배경이 없는 동일한 성의 전혀 관 계없는 사람을 고용해 법망을 피했다는 흥 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편법을 원치 않던 베티와 앙드레는 그 법이 폐지될 때까지 한동안 임시로 블랑팡에서 ‘레이빌 (Rayville)’로 사명을 변경했다. 빌레레 마을 이름의 철자 순서를 기발하게 바꾼 것이다.
블랑팡이라는 이름을 잃은 것 외에도 베티 는 더 많은 위기와 마주했다. 스위스 전역에 서 부도가 만연하게 한 극심한 대공황도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세 번째 위기가 닥쳤는 데, 파트너 앙드레 레알이 출장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연달아 일어난 심각한 위기에서 살아남기 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특히 강 한 마인드의 소유자인 베티는 날카로운 통 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시계 산업에 불어닥친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다른 워 치 하우스들이 예전처럼 사업을 이어가고 자 하는 노력이 번번이 실패하는 것을 목 격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전략을 취했다. 워치 브랜드로서 모든 종류의 제품군을 유 지하려 애쓰기보다 여성 시계와 여성 시계 무브먼트 제작 등 특정 분야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한 이 결정이 블랑팡을 차별화했다. 워치메이커 들은 작은 타임피스나 무브먼트를 개발·생 산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 고 있다. 프레데레크-에밀 시대의 생산 기법 을 연마한 베티는 폭넓은 시계의 세계에서 전문 여성 시계 피스를 선보이며 블랑팡의 위상을 확립했다.
베티는 마케팅 면에서 탁월한 통찰력도 지 니고 있었다. 그녀는 전 세계 다른 지역과 비 교해 미국 경제 상황이 상대적으로 안정되 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곳에서 여성 시 계 판매를 위한 파트너십을 개발하는 데 집 중했다. 완성된 시계에 적용되는 징벌적 관 세를 피하기 위해 그녀는 거의 완성된 시계 부품(무브먼트, 다이얼, 바늘)을 이너 케이 스에 탑재해 판매하는 기발한 전략을 세웠 고, 이후 외부 케이스를 따로 매치해 블랑팡 의 감성을 이끌어내도록 했다.
그녀의 사업 스타일은 확고했고, 자신과 맞 지 않는 이들은 허용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성격과 외모적 면에서 위압적인 면모를 보 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겸손했고 직원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워크 숍에서 근무하는 모든 이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배우자와 자녀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매해 직원 한 명 한 명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서빙 플래터나 실버 오브제 등 무엇이 되었든 중 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직원을 포용하 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그녀는 직원들의 자녀가 즐길 수 있는 놀이 공간 스퀘어 레이 빌(Square Rayville)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수십 년이 흐르기 전까지는 사업체에서 찾 아보기 힘든 사례였다. 그녀는 또 빌레레 대 표로서 직원을 위한 특별한 모임과 축하 행 사를 열었다.
베티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 과 가족처럼 지냈다. 그녀는 블랑팡 직원들 과의 친밀함을 통해 일종의 가족애를 만들 어나갔다. 또 자신의 조카들과 그 자녀들에 게 지극 정성으로 애정을 쏟으며 진정한 가 족으로 끌어안았다. 그녀는 조카 장-자크 피슈테르와 특히 가깝게 지냈다. 장-자크는 베티의 남자 형제이자 스위스에서 상당한 명성을 자랑하는 시인 자크-르네 피슈테르 (Jacques-René Fiechter)의 아들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장-자크는 이집트 알 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부모와 함께 지냈다. 그는 박사 학위를 취득해 교수가 되 기 위해 로잔 대학에서 역사 교육을 받으려 고 1945년 스위스로 돌아왔다. 물론 베티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50년 베티가 처음 암에 걸리면서 모든 것 이 달라졌다. 그녀 앞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놓여 있었다. 장-자크가 그녀와 함께하며 블 랑팡 경영을 돕거나 블랑팡을 매각하는 것 이었다. 장-자크는 워치메이킹이나 사업과 관련해 특별한 경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 만 전자를 택했고, 이렇게 시작된 고모와의 파트너십은 이후 20년 동안 공동 경영 형태 로 이어졌다. 베티는 자신의 조카를 꼼꼼히 가르치면서 그가 생산, 회계, 판매, 유통 등 블랑팡 공정의 모든 부문을 경험하도록 했 다. 그들은 전설의 패프티 패덤즈, 레이디버 드 시계, 메릴린 먼로 (Marilyn Monroe ) 의 블랑팡 이브닝 워치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 었다. 블랑팡은 1년에 시계와 시계 무브먼 트를 20 만 피스 생산할 정도로 훌쩍 성장했 다. 여기에는 워치메이킹 부문에서 선보인 몇 가지 ‘최초’가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협 업을 통해 레이디버드에 장착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라운드무브먼트 (지름11.85mm ) 를 개발했다. 기록적인 작은 사이즈로 주목 받은 무브먼트였을 뿐 아니라 다른 작은 여 성 시계 무브먼트와 비교해 탁월한 견고함 을 자랑했다. 작은 사이즈와 견고함을 동시 에 구현한 혁신의 비결은 기어 트레인에 휠 을 추가로 더한 것이었다. 또 블랑팡은 타임 피스 뒤쪽에 와인딩 크라운을 놓은 선구적 인 여성 시계를 선보였다. 덕분에 디자이너 들은 특히 여성 시계에 어울리는 우아한 옆 모습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한 극도 로 작은 사이즈 (7x18.6mm ) 의 바게트 무브 먼트에서도 블랑팡의 특별한 노하우를 엿 볼 수 있다. 특허 받은 많은 혁신적 발명품 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통해 다이빙 시계 역 사에서 독보적 위상을 확립한 피프티 패덤 즈의 놀라운 성취를 연대기로 만날 수 있다 .
블랑팡에 합류한 것은 장 -자크 혼자만이 아 니었다. 그의 두 형제 르네 (René ) 와 조르주 (Georges) 역시 고모에게 역할을 부여받았 다. 베티는 미국에서 정착하기를 원한 르네 에게 블랑팡을 위한 마켓 확보를 주문했다. 그는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블랑팡의 미국 유통업체이자 이후 미국 해 군과의 피프티 패덤즈 밀 -스펙 (MIL-SPEC) 워치 공급 계약을 성사시킨 앨런 V. 토넥 (Allen V. Tornek)을 만날 수 있었다. 조르 주는 그의 아내와 함께 남미 시장을 개척하 는 임무를 맡았다.
그녀가 조카들에게 블랑팡 내 주요 업무를 맡기며 포용했듯 그녀는 그들의 아내와 아 이들에게도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한 르 네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새로운 집 앞 에 도달한 커다란 트럭 한 대와 마주했다. 그 의 고모가 고른 고급 가구가 가득 실린 트럭 이었다. 여성이라면 주얼리로 포인트를 줘 야 한다고 생각한 베티는 신부를 위한 주얼 리 선물도 아끼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거 나 모든 아이들이 생일을 맞을 때마다 그녀 는 모노그램을 새긴 실버 식기 세트를 선물 했다. 성년이 된 후에는 아이들에게 더욱 가 치 있는 선물을 주었는데, 바로 블랑팡 타임 피스였다. 르네 피슈테르의 아들(르네 3세) 은 아직도 베티에게서 선물 받은 특별한 울 트라-신 이브닝 워치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 다. 베티가 충분하다고 여긴 12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자랑한다. “젠틀맨의 이브닝 워치 에 왜 굳이 더 긴 파워 리저브가 필요하겠는 가?” 하지만 그녀는 고모할머니가 아닌 진 짜 할머니처럼 아이들의 교육에 신경 쓰며 선물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전했다. 르네 3세는 로잔 외곽 풀리(Pully)에 위치한 ‘엔 샨드레(En Chandré)’라 이름 붙인 베티 의 집에서 이루어진 블랑팡의 중요한 비즈 니스 미팅에 함께한 것을 기억한다. 베티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를 논의하고 있었음에 도 그에게 테이블에 있으라 권했고, 그녀의 눈은 그의 팔꿈치가 테이블 위에 있는지를 포함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조카의 자녀 들을 곁에 두고 회의를 진행하며 생긴 특별 한 에피소드도 있다. 한번은 경영진 미팅 동 안 르네가 베티 집 지하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밸브를 발견했다. 그는 돌리고 싶은 유 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것을 돌리는 순간 회의는 중단되었고, 커다란 정원 분수가 분 출되며 베티와 경영진을 흠뻑 적셨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의식과 전통을 만들었 다. 크리스마스에는 한데 모인 식구들을 위 해 아이들이 한 명씩 노래를 부르고 공연을 했다. 물론 제한도 있었다. 희귀한 앤티크와 예술품으로 가득한 로잔 하우스의 방에는 아이들이 들어갈 수 없었다. 르네 3세의 어 린 동생이 그 규칙을 깨고(다행히 고가의 컬 렉션 중 망가진 것은 없었다) 자신이 규칙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그녀는 그의 정 직함을 높이 사며 범선 모델을 선물했다. 규 율, 매너, 전통, 규칙도 중요했지만 그녀에 게는 즐거움 역시 중요했다. 그녀는 경영진 과의 회의가 너무 지루하게 늘어지는 것 같 다고 생각하면 즉흥적으로 아이들과 경영 진을 이끌고 고카트 레이싱을 하러 나갔다. 베티는 주얼리와 포멀한 의상을 착용한 채 카트에 앉았고, 역시 비즈니스 룩을 입은 경 영진이 뒤를 이었다. 그녀가 엉뚱한 방향으 로 출발하며 붕 날아오르는 순간 아이들과 그들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또 한 번은 장-자크의 가족과 프랑스 리비에라 (Riviera)에 있는 카뉴쉬르-메르(Cagnessur-Mer)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시간을 보낸 후 그녀는 그의 아들 장-마리(Jean-Marie)의 첫 비행기 여행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며 그와 둘이 니스(Nice)에서 제네바 (Geneva)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1968년 크리스마스
친애하는 친구들에게,
‘옛날 옛적’. 제 어린 시절 동화는 이렇게 시작하곤 했습니다. 제 이야기도 그렇게 시작하 려고 합니다. 옛날 옛적 1932년 심각한 워치메이킹 위기에 직면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몇 명은 오늘 저녁 이곳에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저와 제 동료를 믿어주었고, 그들의 신뢰 덕분에 우리는 블랑팡을 인수해 레이빌 S.A.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밤 저는 작별을 고하며 그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제 동료 앙드레 레알의 얼굴을 기억할 것입니다. 어두운 시절 우리는 함께 힘을 합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조금씩 밝혀나갔고 결국 반짝이는 빛을 만 들어냈습니다. 레알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도 저를 변함없이 믿어준 것에 대해 감사 인 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 제 조카 장-자크 피슈테르가 레이빌 S.A. 전체를 책임지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는 명예 회장으로 남을 것이고, 이 역시 저에게 너무나 소중한 직함입니다. 따라서 제가 바쳤던 삶 자체에 완전한 작별 인사를 고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이전에도 언급했듯 저는 여러분이 보여준 믿음, 우정, 이해심 덕분에 우리만의 길을 순조롭게 항해해나갈 수 있었 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작별을 고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아쉽습니다. 제가 거동하지 못하 는 동안 여러분들이 저를 방문하고 전화를 걸고, 꽃과 아름다운 책을 선물해주며 저를 응 원해준 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평생을 바친 제 자리를 떠나는 이 순간 슬픔과 눈물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럼에도 저는 과거에도 그랬듯 여러분을 향해 미소 짓고 싶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크리스마 스와 새해가 되길 기원하려고 합니다. 레이빌은 장-자크 피슈테르, 그의 동료들과 함께 과 거에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은 끊임없이 발전해나가는 이 메커니즘의 중요한 톱니이자 수혜자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축하게 될 것 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께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합니다.
블랑팡에 몸담자마자 연이어 닥친 위기 이 후에도 그녀의 커리어에서 위협적인 위기 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역시 사업 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1960년대 후반 닥쳐온 전반적인 시계 산업 의 불황이었다. 아시아와 쿼츠로 촉발된 경 쟁이 스위스 시계 산업 전반을 뒤흔들었다. 베티와 장 -자크는 오메가 (Omega), 누벨 르 마니아 (Nouvelle Lemania), 티쏘 (Tissot ) 와 함께 블랑팡을 SSIH(Société Suisse pour l’Industrie Horlogère ) 에 합병시켰다. 각각 의 워치 하우스는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 는 한편 자원을 공유하며 생산 효율성을 유 지하고 확대했다. 물론 베티는 이 새로운 체 제하에서 이사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로 잔 근처 자신의 집이나 프랑스 리비에라에 있는 세컨드 하우스를 넘나들며 회의를 주 재하곤 했다. 블랑팡은 SSIH 의 다양한 브랜 드를 위한 무브먼트를 공급하며 중요한 역 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블랑팡과 SSIH 를 이끌어나가며 인 상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한편 예술계에서, 또 로잔, 카뉴쉬르-메르에서 산책을 즐기 거나 파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유명 인사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세련된 취향 을 지닌 그녀는 오뷔송(Aubusson) 태피스 트리, 피카소와 르누아르의 작품, 고대 아이 콘 등을 수집했고, 그중 일부는 가족에게 선 물하기도 했다. 또 감각적인 의상과 독특한 감성을 담은 주얼리로 로잔 도심에서 예술 적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겨울에는 퍼를 두르고 주얼리로 치장하며 항상 우아한 차 림을 고수하던 그녀는 만성 발 통증을 겪는 동안 핑크 테리 소재의 실내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베티는 1971 년 9 월 초 비엔 (Bienne )에서 세 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녀는 조 카의 아들 장-마리에게 보내는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적었다. 그 메시지는 그녀가 세상 을 떠난 후 9 월 말 장 -마리의 생일에 전달 되었다. 또 그녀는 빌레레를 위해 레 플랑 시의 땅 중 상당 부분을 헌납했다. 그 땅은 현재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블 랑팡의 기념비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녀만큼 큰 성취를 이룩한 여성은 거의 없 다. 스위스에서 여성이 기업인으로서 두각 을 드러내지 못하던 때 그녀는 성공을 거두 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호락호락하지 않은 역경을 딛고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녀는 전 통을 존중하고 현대성을 함께 끌어안으며 자신만의 길을 모색해나갔다. 그녀는 진정 으로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아직까지도 블랑팡에 중요한 의미 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