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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챕터 2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여성

그녀는 블랑팡을 키우고 성장시킨 스위스 워치 하우 스 최초의 여성 CEO이자 오너였다. 그녀는 대공황, 세계대전, 사업 파트너의 죽음, 쿼츠 워치의 등장 등 많은 위기를 헤쳐나갔다.

챕터 저자

제프리 S. 킹스턴

챕터 저자

제프리 S. 킹스턴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여성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여성
매거진 21 챕터 2

그녀는 레이디버드와 피프티 패덤즈 등 많은 것을 이룩했지만, 살아생전 투표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베티(Betty)’로 알려진 베르테-마리 피슈 테르(Berthe-Marie Fiechter)는 제 1차 세 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12년 경력 을 시작했다. 제1·2차 세계대전, 대공황, 사 업 파트너의 죽음, 암과의 투쟁, 스위스 시 계 산업 전반을 무너뜨린 쿼츠 위기 등을 거치면서도 그녀는 피프티 패덤즈와 레이 디버드 등 선구적 타임피스를 만들어내고 블랑팡을 무브먼트 매뉴팩처로 성장시키 며 블랑팡을 위한 자신의 비전을 펼쳤다. 그녀는 스위스 워치 하우스의 첫 여성 CEO이자 오너였지만 그녀 생전에 스위스 여성의 권리는 확립되지 못했다.

스위스의 외딴 마을 빌레레 (Villeret ) 는 블 랑팡의 탄생지이자 이후 2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블랑팡의 집이었다. 현재 레 플랑시 (Les Planches) 옆으로 향한 북쪽 언덕을 지 나 빌레레를 찾는 방문객들은 그녀의 삶을 기리는 기념비를 지나가게 될 것이다. 그녀 의 흉상이 1896 년 그녀가 탄생하고 1971 년 세상을 떠난 곳 위에 자리한 수즈 (Suze) 너 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세상 을 떠난 후 거의 반세기가 흘렀지만 빌레레 의 연장자들은 아직도 그녀를 잊지 않고 있 다. 그녀의 커리어가 없었다면 블랑팡의 역 사를 써 내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 

피슈테르 가족의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자매 마거리트(기스), 어머니 마리, 아버지 제이콥. 뒷줄은 형제 모리스와 베티. 

피슈테르 가족의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자매 마거리트(기스), 어머니 마리, 아버지 제이콥. 뒷줄은 형제 모리스와 베티. 

빌레레 워크숍. 

빌레레 워크숍. 

베티를 기리는 빌레레 기념비. 

베티를 기리는 빌레레 기념비. 

베티는 사업에서 정점에 올랐지만 결코 유 리한 고지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와는 정반대로 견습과 함께 모든 기본 교육 을 이수했다. 그녀가 자라온 환경이 고향에 뿌리를 둔 워치메이킹 커리어로 그녀를 이 끌었다. 그녀의 아버지 제이콥 피슈테르 (Jacob Fiechter)는 여자 형제의 가족과 함 께 빌레레를 가로지르는 메인 도로 바로 위 에 자리한 작은 컴플리케이션 워치 무브먼 트 사업체 마뉘팍티르 데보슈 콩플리케 외 젠 람 (Manufacture d’Ébauches Compliquées Eugène Rahm ) 을 공동 운영했다 . 이후 이 사 업체는 1914 년 블랑팡에 인수되었다. 베티 는 커리큘럼에 파트타임 견습이 포함되어 있 는 지역 비즈니스 스쿨 (École de Commerce , 이중 교육 비즈니스 스쿨 ) 에 등록하며 시계 관련 커리어에 뛰어들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리고 1912 년 시작된 견습을 위해 이미 빌 레레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자리 잡은 블랑팡 을 선택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반세 기가 넘는 시간 동안 블랑팡과 함께하게 되 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빌레 레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상티미에 (St. Imier) 병원에 입원한 프랑스 부상병을 돌 보는 파트타임 봉사를 했다. 스위스는 전쟁 내내 중립을 유지했고 침공도 일어나지 않 았지만,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이 부상병을 위해 스위스에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허가 했다. 대신 회복 후 전쟁터로 돌아가지 않는 다는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스위스는 관용 의 일환으로 일반 참모가 부상병을 돌보기 위해 스위스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 이 러한 과정을 거쳐 베티와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앙드레 레알 (André Léal )이라는 프랑 스 장교 참모였다. 그는 전쟁에서 임무를 수 행하는 동안 베티를 만났고, 이후 그녀의 인 생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3년의 견습을 거친 베티는 1915 년 프레데리 크 -에밀 블랑팡 (Frédéric-Emile Blancpain ) 의 어시스턴트로 정식 고용되었다. 프레데 리크 -에밀은 1735 년 빌레레에서 가족 사업 을 시작한 예한 -자크 블랑팡 (Jehan-Jacques Blancpain ) 의 6대손이었다. 예한 -자크의 후 손들은 기술, 정치, 경제의 발전 속에서 사 업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갔다. 1900년까지 빌레레를 고향이라 부르는 워치 하우스가 20개나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얼마나 큰 성 공을 거두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이 숫자 는 3개로 줄어들었고, 블랑팡은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베티 피슈테르가 마주한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즈니스 리더는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블랑팡에서 보낸 13년간 프레데리크-에밀 은 베티를 빌레레 워크숍의 디렉터로 훈련 시키며 모든 생산 과정을 관할하게 했다. 그 가 베티에게 사업체를 경영하도록 하고 자 신은 거처를 빌레레에서 로잔(Lausanne)으 로 옮기며 매일 살펴보지 않은 것도 그녀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베 티는 현재도 빌레레에 자리하고 있는 블랑 팡 건물 사무실 위층에서 지냈다. 어떤 면에 서 이 둘의 관계는 꽤 현대적이고 진보적이 었다. 그들은 딕터폰(Dictaphone) 왁스 실 린더 녹음기를 사용해 우편으로 커뮤니케 이션했다.

프레데리크-에밀은 1932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딸 넬리(Nellie)는 가족 사업을 이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베티가 대신 블 랑팡을 인수하길 바랐다. 넬리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베티에게 감동적인 편지 를 보냈다. 

“아버지의 빌레레가 막을 내리는 것은 너무 나 슬프지만 이 슬픔을 조금이라도 줄일 유 일한 방법은 바로 당신과 미스터 레알이 함 께 매뉴팩처를 인수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로 인해 저는 블랑팡의 소 중한 과거와 전통이 계속 계승될 수 있으리 라 믿습니다. 

당신은 아버지에게 몇 안 되는 소중한 파트너 였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이 베풀어준 친절함 과 부드러움을 제 마음속에 새기겠습니다.” 

전쟁을 겪으며 빌레레와 친숙해진 앙드레 레알은 블랑팡에서 스위스 이외 마켓을 공 략하는 세일즈를 담당하게 되었다. 넬리의 편지에서 언급한 대로 앙드레는 베티와 함 께 블랑팡을 인수했다. 

파트너십을 맺은 초기에는 상황이 결코 만 만치 않았다. 우선 그들은 ‘블랑팡’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잃었다. 당시 스위스 법규에 따르면 사업체명에 가족 이름이 들 어갈 경우 그 가족의 성을 사용하는 사람이 사업체에 한 명도 없을 경우에는 브랜드명 을 사용할 수 없었다. 프레데리크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는 브랜드에 블랑팡 가족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블 랑팡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 다. 현존하는 유명 제네바 시계업체가 가족 사업을 이어갈 일원이 없어지자 시계 관련 기술이나 배경이 없는 동일한 성의 전혀 관 계없는 사람을 고용해 법망을 피했다는 흥 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편법을 원치 않던 베티와 앙드레는 그 법이 폐지될 때까지 한동안 임시로 블랑팡에서 ‘레이빌 (Rayville)’로 사명을 변경했다. 빌레레 마을 이름의 철자 순서를 기발하게 바꾼 것이다. 

블랑팡이라는 이름을 잃은 것 외에도 베티 는 더 많은 위기와 마주했다. 스위스 전역에 서 부도가 만연하게 한 극심한 대공황도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세 번째 위기가 닥쳤는 데, 파트너 앙드레 레알이 출장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연달아 일어난 심각한 위기에서 살아남기 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특히 강 한 마인드의 소유자인 베티는 날카로운 통 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시계 산업에 불어닥친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다른 워 치 하우스들이 예전처럼 사업을 이어가고 자 하는 노력이 번번이 실패하는 것을 목 격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전략을 취했다. 워치 브랜드로서 모든 종류의 제품군을 유 지하려 애쓰기보다 여성 시계와 여성 시계 무브먼트 제작 등 특정 분야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한 이 결정이 블랑팡을 차별화했다. 워치메이커 들은 작은 타임피스나 무브먼트를 개발·생 산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 고 있다. 프레데레크-에밀 시대의 생산 기법 을 연마한 베티는 폭넓은 시계의 세계에서 전문 여성 시계 피스를 선보이며 블랑팡의 위상을 확립했다. 

1963년경 빌레레 워크숍의 모습. 블랑팡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 세상을 떠나고 몇 년간 블랑팡은 “레 이빌(Rayville)”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스위스 법 규 때문이었다. 

1963년경 빌레레 워크숍의 모습. 블랑팡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 세상을 떠나고 몇 년간 블랑팡은 “레 이빌(Rayville)”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스위스 법 규 때문이었다.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여성

베티는 성격과 외모에서 상당히 압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겸손했고 직원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그들 대부분을 가족의 연장선으로 생각했다. 

베티는 마케팅 면에서 탁월한 통찰력도 지 니고 있었다. 그녀는 전 세계 다른 지역과 비 교해 미국 경제 상황이 상대적으로 안정되 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곳에서 여성 시 계 판매를 위한 파트너십을 개발하는 데 집 중했다. 완성된 시계에 적용되는 징벌적 관 세를 피하기 위해 그녀는 거의 완성된 시계 부품(무브먼트, 다이얼, 바늘)을 이너 케이 스에 탑재해 판매하는 기발한 전략을 세웠 고, 이후 외부 케이스를 따로 매치해 블랑팡 의 감성을 이끌어내도록 했다.

그녀의 사업 스타일은 확고했고, 자신과 맞 지 않는 이들은 허용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성격과 외모적 면에서 위압적인 면모를 보 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겸손했고 직원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워크 숍에서 근무하는 모든 이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배우자와 자녀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매해 직원 한 명 한 명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서빙 플래터나 실버 오브제 등 무엇이 되었든 중 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직원을 포용하 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그녀는 직원들의 자녀가 즐길 수 있는 놀이 공간 스퀘어 레이 빌(Square Rayville)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수십 년이 흐르기 전까지는 사업체에서 찾 아보기 힘든 사례였다. 그녀는 또 빌레레 대 표로서 직원을 위한 특별한 모임과 축하 행 사를 열었다. 

베티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 과 가족처럼 지냈다. 그녀는 블랑팡 직원들 과의 친밀함을 통해 일종의 가족애를 만들 어나갔다. 또 자신의 조카들과 그 자녀들에 게 지극 정성으로 애정을 쏟으며 진정한 가 족으로 끌어안았다. 그녀는 조카 장-자크 피슈테르와 특히 가깝게 지냈다. 장-자크는 베티의 남자 형제이자 스위스에서 상당한 명성을 자랑하는 시인 자크-르네 피슈테르 (Jacques-René Fiechter)의 아들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장-자크는 이집트 알 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부모와 함께 지냈다. 그는 박사 학위를 취득해 교수가 되 기 위해 로잔 대학에서 역사 교육을 받으려 고 1945년 스위스로 돌아왔다. 물론 베티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어린 장-자크와 그의 여동생 니콜과 함 께 있는 베티. 

어린 장-자크와 그의 여동생 니콜과 함 께 있는 베티. 

1965년 제네바 레 장바사데 부티크 오 프닝에 함께한 베티와 장-자크. 

1965년 제네바 레 장바사데 부티크 오 프닝에 함께한 베티와 장-자크. 

베티와 장-자크의 사업적 협업은 전설적인 패프티 패덤 즈, 레이디버드 여성 시계, 메릴린 먼로의 블랑팡 이브닝 워치 등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1950년 베티가 처음 암에 걸리면서 모든 것 이 달라졌다. 그녀 앞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놓여 있었다. 장-자크가 그녀와 함께하며 블 랑팡 경영을 돕거나 블랑팡을 매각하는 것 이었다. 장-자크는 워치메이킹이나 사업과 관련해 특별한 경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 만 전자를 택했고, 이렇게 시작된 고모와의 파트너십은 이후 20년 동안 공동 경영 형태 로 이어졌다. 베티는 자신의 조카를 꼼꼼히 가르치면서 그가 생산, 회계, 판매, 유통 등 블랑팡 공정의 모든 부문을 경험하도록 했 다. 그들은 전설의 패프티 패덤즈, 레이디버 드 시계, 메릴린 먼로 (Marilyn Monroe ) 의 블랑팡 이브닝 워치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 었다. 블랑팡은 1년에 시계와 시계 무브먼 트를 20 만 피스 생산할 정도로 훌쩍 성장했 다. 여기에는 워치메이킹 부문에서 선보인 몇 가지 ‘최초’가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협 업을 통해 레이디버드에 장착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라운드무브먼트 (지름11.85mm ) 를 개발했다. 기록적인 작은 사이즈로 주목 받은 무브먼트였을 뿐 아니라 다른 작은 여 성 시계 무브먼트와 비교해 탁월한 견고함 을 자랑했다. 작은 사이즈와 견고함을 동시 에 구현한 혁신의 비결은 기어 트레인에 휠 을 추가로 더한 것이었다. 또 블랑팡은 타임 피스 뒤쪽에 와인딩 크라운을 놓은 선구적 인 여성 시계를 선보였다. 덕분에 디자이너 들은 특히 여성 시계에 어울리는 우아한 옆 모습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한 극도 로 작은 사이즈 (7x18.6mm ) 의 바게트 무브 먼트에서도 블랑팡의 특별한 노하우를 엿 볼 수 있다. 특허 받은 많은 혁신적 발명품 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통해 다이빙 시계 역 사에서 독보적 위상을 확립한 피프티 패덤 즈의 놀라운 성취를 연대기로 만날 수 있다 .

블랑팡에 합류한 것은 장 -자크 혼자만이 아 니었다. 그의 두 형제 르네 (René ) 와 조르주 (Georges) 역시 고모에게 역할을 부여받았 다. 베티는 미국에서 정착하기를 원한 르네 에게 블랑팡을 위한 마켓 확보를 주문했다. 그는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블랑팡의 미국 유통업체이자 이후 미국 해 군과의 피프티 패덤즈 밀 -스펙 (MIL-SPEC) 워치 공급 계약을 성사시킨 앨런 V. 토넥 (Allen V. Tornek)을 만날 수 있었다. 조르 주는 그의 아내와 함께 남미 시장을 개척하 는 임무를 맡았다. 

메릴린 먼로의 블랑팡 시계.

메릴린 먼로의 블랑팡 시계.

피프티 패덤즈와 함께 레이디버드 의 많은 주얼리 버전 중 하나

피프티 패덤즈와 함께 레이디버드 의 많은 주얼리 버전 중 하나

그녀가 조카들에게 블랑팡 내 주요 업무를 맡기며 포용했듯 그녀는 그들의 아내와 아 이들에게도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한 르 네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새로운 집 앞 에 도달한 커다란 트럭 한 대와 마주했다. 그 의 고모가 고른 고급 가구가 가득 실린 트럭 이었다. 여성이라면 주얼리로 포인트를 줘 야 한다고 생각한 베티는 신부를 위한 주얼 리 선물도 아끼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거 나 모든 아이들이 생일을 맞을 때마다 그녀 는 모노그램을 새긴 실버 식기 세트를 선물 했다. 성년이 된 후에는 아이들에게 더욱 가 치 있는 선물을 주었는데, 바로 블랑팡 타임 피스였다. 르네 피슈테르의 아들(르네 3세) 은 아직도 베티에게서 선물 받은 특별한 울 트라-신 이브닝 워치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 다. 베티가 충분하다고 여긴 12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자랑한다. “젠틀맨의 이브닝 워치 에 왜 굳이 더 긴 파워 리저브가 필요하겠는 가?” 하지만 그녀는 고모할머니가 아닌 진 짜 할머니처럼 아이들의 교육에 신경 쓰며 선물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전했다. 르네 3세는 로잔 외곽 풀리(Pully)에 위치한 ‘엔 샨드레(En Chandré)’라 이름 붙인 베티 의 집에서 이루어진 블랑팡의 중요한 비즈 니스 미팅에 함께한 것을 기억한다. 베티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를 논의하고 있었음에 도 그에게 테이블에 있으라 권했고, 그녀의 눈은 그의 팔꿈치가 테이블 위에 있는지를 포함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조카의 자녀 들을 곁에 두고 회의를 진행하며 생긴 특별 한 에피소드도 있다. 한번은 경영진 미팅 동 안 르네가 베티 집 지하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밸브를 발견했다. 그는 돌리고 싶은 유 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것을 돌리는 순간 회의는 중단되었고, 커다란 정원 분수가 분 출되며 베티와 경영진을 흠뻑 적셨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의식과 전통을 만들었 다. 크리스마스에는 한데 모인 식구들을 위 해 아이들이 한 명씩 노래를 부르고 공연을 했다. 물론 제한도 있었다. 희귀한 앤티크와 예술품으로 가득한 로잔 하우스의 방에는 아이들이 들어갈 수 없었다. 르네 3세의 어 린 동생이 그 규칙을 깨고(다행히 고가의 컬 렉션 중 망가진 것은 없었다) 자신이 규칙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그녀는 그의 정 직함을 높이 사며 범선 모델을 선물했다. 규 율, 매너, 전통, 규칙도 중요했지만 그녀에 게는 즐거움 역시 중요했다. 그녀는 경영진 과의 회의가 너무 지루하게 늘어지는 것 같 다고 생각하면 즉흥적으로 아이들과 경영 진을 이끌고 고카트 레이싱을 하러 나갔다. 베티는 주얼리와 포멀한 의상을 착용한 채 카트에 앉았고, 역시 비즈니스 룩을 입은 경 영진이 뒤를 이었다. 그녀가 엉뚱한 방향으 로 출발하며 붕 날아오르는 순간 아이들과 그들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또 한 번은 장-자크의 가족과 프랑스 리비에라 (Riviera)에 있는 카뉴쉬르-메르(Cagnessur-Mer)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시간을 보낸 후 그녀는 그의 아들 장-마리(Jean-Marie)의 첫 비행기 여행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며 그와 둘이 니스(Nice)에서 제네바 (Geneva)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레이디버드와 1956년 출시 당시의 광고

레이디버드와 1956년 출시 당시의 광고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1968년 크리스마스

친애하는 친구들에게,

‘옛날 옛적’. 제 어린 시절 동화는 이렇게 시작하곤 했습니다. 제 이야기도 그렇게 시작하 려고 합니다. 옛날 옛적 1932년 심각한 워치메이킹 위기에 직면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몇 명은 오늘 저녁 이곳에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저와 제 동료를 믿어주었고, 그들의 신뢰 덕분에 우리는 블랑팡을 인수해 레이빌 S.A.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밤 저는 작별을 고하며 그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제 동료 앙드레 레알의 얼굴을 기억할 것입니다. 어두운 시절 우리는 함께 힘을 합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조금씩 밝혀나갔고 결국 반짝이는 빛을 만 들어냈습니다. 레알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도 저를 변함없이 믿어준 것에 대해 감사 인 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 제 조카 장-자크 피슈테르가 레이빌 S.A. 전체를 책임지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는 명예 회장으로 남을 것이고, 이 역시 저에게 너무나 소중한 직함입니다. 따라서 제가 바쳤던 삶 자체에 완전한 작별 인사를 고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이전에도 언급했듯 저는 여러분이 보여준 믿음, 우정, 이해심 덕분에 우리만의 길을 순조롭게 항해해나갈 수 있었 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작별을 고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아쉽습니다. 제가 거동하지 못하 는 동안 여러분들이 저를 방문하고 전화를 걸고, 꽃과 아름다운 책을 선물해주며 저를 응 원해준 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평생을 바친 제 자리를 떠나는 이 순간 슬픔과 눈물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럼에도 저는 과거에도 그랬듯 여러분을 향해 미소 짓고 싶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크리스마 스와 새해가 되길 기원하려고 합니다. 레이빌은 장-자크 피슈테르, 그의 동료들과 함께 과 거에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은 끊임없이 발전해나가는 이 메커니즘의 중요한 톱니이자 수혜자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축하게 될 것 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께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합니다.

명예 회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축소되었음을 알리고 자신이 블랑팡과 함께한 30년이 넘는 시간을 되돌아본 베티 피슈테르의 1968년 크리스마스 메시지. 

명예 회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축소되었음을 알리고 자신이 블랑팡과 함께한 30년이 넘는 시간을 되돌아본 베티 피슈테르의 1968년 크리스마스 메시지. 

그녀는 진정 영향력 있는 여성 이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아직까지도 블랑팡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블랑팡에 몸담자마자 연이어 닥친 위기 이 후에도 그녀의 커리어에서 위협적인 위기 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역시 사업 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1960년대 후반 닥쳐온 전반적인 시계 산업 의 불황이었다. 아시아와 쿼츠로 촉발된 경 쟁이 스위스 시계 산업 전반을 뒤흔들었다. 베티와 장 -자크는 오메가 (Omega), 누벨 르 마니아 (Nouvelle Lemania), 티쏘 (Tissot ) 와 함께 블랑팡을 SSIH(Société Suisse pour l’Industrie Horlogère ) 에 합병시켰다. 각각 의 워치 하우스는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 는 한편 자원을 공유하며 생산 효율성을 유 지하고 확대했다. 물론 베티는 이 새로운 체 제하에서 이사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로 잔 근처 자신의 집이나 프랑스 리비에라에 있는 세컨드 하우스를 넘나들며 회의를 주 재하곤 했다. 블랑팡은 SSIH 의 다양한 브랜 드를 위한 무브먼트를 공급하며 중요한 역 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블랑팡과 SSIH 를 이끌어나가며 인 상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한편 예술계에서, 또 로잔, 카뉴쉬르-메르에서 산책을 즐기 거나 파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유명 인사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세련된 취향 을 지닌 그녀는 오뷔송(Aubusson) 태피스 트리, 피카소와 르누아르의 작품, 고대 아이 콘 등을 수집했고, 그중 일부는 가족에게 선 물하기도 했다. 또 감각적인 의상과 독특한 감성을 담은 주얼리로 로잔 도심에서 예술 적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겨울에는 퍼를 두르고 주얼리로 치장하며 항상 우아한 차 림을 고수하던 그녀는 만성 발 통증을 겪는 동안 핑크 테리 소재의 실내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베티는 1971 년 9 월 초 비엔 (Bienne )에서 세 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녀는 조 카의 아들 장-마리에게 보내는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적었다. 그 메시지는 그녀가 세상 을 떠난 후 9 월 말 장 -마리의 생일에 전달 되었다. 또 그녀는 빌레레를 위해 레 플랑 시의 땅 중 상당 부분을 헌납했다. 그 땅은 현재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블 랑팡의 기념비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녀만큼 큰 성취를 이룩한 여성은 거의 없 다. 스위스에서 여성이 기업인으로서 두각 을 드러내지 못하던 때 그녀는 성공을 거두 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호락호락하지 않은 역경을 딛고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녀는 전 통을 존중하고 현대성을 함께 끌어안으며 자신만의 길을 모색해나갔다. 그녀는 진정 으로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아직까지도 블랑팡에 중요한 의미 를 지닌다.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여성

챕터 03

컬러의 변화

An expanded color palette comes to the Fifty Fathoms Bathyscaphe.

챕터 저자

제프리 S. 킹스턴
컬러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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